
미국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가 둔화하면서 국내 배터리 업계의 실적 회복 시점도 늦어지고 있다.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전체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기차용 배터리 수요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본격적인 반등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하나증권에 따르면 올해 1~7월 미국의 순수전기차(BEV)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8% 감소했다. 미국 연방정부의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가 지난해 9월 종료된 이후 판매 감소가 본격화한 영향으로 분석된다.
같은 기간 미국 신차 판매에서 순수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도 5.9%로 전년 동기보다 1.9%포인트 낮아졌다.
미국 시장의 부진은 국내 배터리 업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기차용 배터리는 국내 주요 배터리 기업 전체 매출의 약 60%를 차지한다. 국내 셀 제조사들의 전기차 배터리 출하량 가운데 미국 비중도 지난해 3분기 47%에서 올해 2분기 18%까지 떨어졌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를 배경으로 ESS 사업이 새로운 성장축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전기차용 배터리 사업의 감소분을 모두 메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 전기차 시장이 단기간에 회복하기 어려운 배경에는 현지 자동차 소비 특성도 있다.
미국에서는 준중형 이상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과 픽업트럭이 전체 자동차 판매의 약 70%를 차지한다. 차체가 크고 장거리 운행이 많은 차량을 선호하는 소비자가 많다는 의미다.
휘발유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점도 전기차 전환 속도를 늦추는 요인이다. 미국의 평균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약 1.3달러로 유럽 주요 국가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바꿨을 때 체감할 수 있는 연료비 절감 효과가 상대적으로 작다.
주행거리 역시 중요한 변수다. 미국 자동차 소유자의 연평균 주행거리는 약 1만9000㎞로 동아시아와 유럽의 약 1만500㎞보다 8500㎞가량 길다.
일반적인 전기차의 1회 충전 주행거리가 약 500㎞인 반면, 대형 SUV나 픽업트럭은 한 번 주유로 1000㎞ 안팎을 달릴 수 있다. 충전 인프라와 긴 이동거리를 고려하면 미국 소비자에게 전기차 전환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클 수 있다.
자율주행 확산이 배터리 수요의 새 변수
장기적으로는 자율주행과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가 배터리 시장의 흐름을 바꿀 변수로 꼽힌다.
자율주행 기능이 고도화될수록 차량 내부의 센서와 AI 반도체, 통신장비 등 전자시스템이 늘어나면서 전력 소비도 증가한다. 전기차는 배터리와 모터를 중심으로 차량 전장 시스템을 통합하기 쉽기 때문에 고도화된 자율주행 기술과 결합하는 데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자동차 이용 방식이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현재 개인 차량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주차된 상태로 보내지만, 완전자율주행이 가능해질 경우 차주가 이용하지 않는 시간에 로보택시로 운행하는 형태가 확산될 수 있다.
차량에 탑재된 AI 반도체를 분산형 연산에 활용하거나 전력요금이 낮은 시간에 충전한 뒤 필요할 때 전력을 공급하는 ‘이동형 ESS’ 모델도 거론된다.
차량 가동시간이 늘어나면 배터리 충·방전 횟수가 증가하고 노후화 속도도 빨라질 수 있다. 자동차 판매량 증가뿐 아니라 배터리 교체 수요까지 함께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조건부 자율주행인 레벨3 이상 차량이 2035년 승용차 판매에서 약 37%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전 세계 로보택시 운행대수가 2025년 약 7000대에서 2035년 600만대 수준까지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자율주행 기술의 상용화 시기와 규제, 경제성은 아직 불확실성이 크다. 따라서 단기적으로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실적은 미국 전기차 판매 회복 여부와 ESS 성장 속도에 더 큰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K배터리의 장기 성장성은 단순히 전기차 판매대수가 얼마나 늘어나는지를 넘어 자율주행과 로보택시 확산이 자동차의 배터리 사용량 자체를 얼마나 증가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미국 전기차 시장의 부진이 길어지는 가운데 ESS가 단기적인 완충 역할을 하고, 자율주행이 중장기적인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가 국내 배터리 업계의 향후 실적을 가를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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