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와 국내 주요 기업들이 대규모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계획된 시설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국내 수요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결국 글로벌 AI 기업과 클라우드 사업자의 연산 수요를 얼마나 국내로 끌어오느냐가 사업 성패를 좌우할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는 SK, GS, 네이버 등과 함께 2029년까지 총 8.4기가와트(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기업별로는 SK가 5GW, GS가 2.4GW, 네이버가 1GW를 맡는 구상이다.
8.4GW는 약 420만대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가동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추산된다. 초거대 AI 모델 학습에 10만장 단위의 GPU 클러스터가 활용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규모다. 대형 AI 모델 학습뿐 아니라 기업 대상 생성형 AI 추론 서비스까지 폭넓게 지원할 수 있는 인프라로 평가된다.
문제는 이런 대규모 설비를 채울 수요다.
한화투자증권은 2030년 국내 AI 데이터센터 자체 수요를 약 2.5GW로 추정했다. 정부와 공공부문이 0.6GW, 국내 대기업 자체 사용이 1.4GW, 일반 기업의 GPU 임대 수요가 0.5GW 수준이다.
반면 2030년 전체 AI 데이터센터 수요 목표는 약 7GW다. 이를 달성하려면 나머지 4.5GW를 해외 고객에게서 확보해야 한다. 전체 수요의 약 64%를 외부에서 끌어와야 한다는 계산이다.
GPU 기준으로 보면 국내 수요가 약 125만장, 해외 수요가 약 225만장에 해당한다.
해외 연산 수요 유치가 핵심
잠재 고객으로는 자체 데이터센터만으로 필요한 GPU를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운 글로벌 AI 기업과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가 꼽힌다.
전력비와 데이터센터 건설 비용이 높은 일본, 토지와 전력 공급에 제약이 있는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 기업 역시 주요 고객 후보로 거론된다.
특히 AI 모델 학습과 시뮬레이션, 합성데이터 생성처럼 지연시간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작업은 국가 간 데이터센터 이용이 가능하다. 이 경우 기업이 자국에 직접 데이터센터를 구축하지 않고 해외의 연산능력을 빌려 사용하는 형태가 확산될 수 있다.
한국은 이런 시장에서 몇 가지 강점을 갖고 있다.
우선 세계적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기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고속 통신 인프라와 클라우드 운영 경험도 축적돼 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등 주요 아시아 시장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도 장점이다.
해외 고객에게 GPU 연산능력을 판매할 수 있다면 기존의 반도체 수출과는 다른 새로운 산업 모델도 가능해진다. 국내에서 생산한 ‘컴퓨팅 자원’을 서비스 형태로 해외에 판매하는 것이다.
4.5GW 아직 확정 수요 아냐
다만 필요한 해외 수요 4.5GW는 현재 확보된 계약 물량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불확실성이다.
관련 분석에 따르면 이 정도 규모를 확보하려면 2030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국가 간 이동이 가능한 AI 연산 수요 가운데 약 30%를 한국이 가져와야 한다.
현재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AI·클라우드 업체들과 다양한 협력을 추진하고 있지만 상당수는 업무협약이나 투자 검토 단계에 머물러 있다.
장기 사용 계약 없이 데이터센터부터 먼저 구축할 경우 투자 부담이 커질 수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GPU와 서버, 전력설비 등에 대규모 자금이 들어가는 데다 GPU는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 감가상각 부담도 크다.
가동률이 낮더라도 투자비용은 계속 발생하고, 차세대 GPU가 출시될 때마다 장비 교체 부담도 생긴다. 데이터센터 규모가 크다고 해서 곧바로 높은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 이유다.
결국 AI 데이터센터 사업의 경쟁력은 시설 규모보다 실제 가동률과 고객 계약 구조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해외 기업과 장기계약을 확보하고 높은 가동률을 유지하면서 GPU 임대단가와 전력원가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야 대규모 투자가 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UBS 역시 한국 데이터센터 운영업체가 수요와 전력 여건 등을 고려할 때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아시아·태평양 시장의 공급과잉 가능성은 경계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결국 8.4GW라는 숫자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 연산능력을 실제로 사용할 것이냐다. 국내 수요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운영 기반을 만들고 동시에 해외 AI 기업의 수요까지 끌어들여 ‘컴퓨팅 수출’ 구조를 구축할 수 있을지가 한국 AI 데이터센터 전략의 성패를 가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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