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를 대상으로 집중투표제가 본격 시행되는 가운데 일부 대기업들이 이사 수를 줄이거나 임기 만료 시점을 분산하는 방식으로 이사회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소수주주가 특정 후보에게 의결권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한 제도가 도입되자, 한 번에 선임하는 이사 수 자체를 줄여 후보 당선에 필요한 지분율을 높이려는 움직임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집중투표제 배제 금지 조항은 10일부터 정식 시행된다. 이에 따라 자산 2조원 이상 상장회사는 정관 등을 통해 집중투표제를 사실상 배제하기 어려워진다. 감사위원회에서도 다른 이사와 별도로 뽑는 감사위원 수가 기존 1명에서 2명 이상으로 확대된다.
집중투표제는 이사를 여러 명 선임할 때 주주에게 ‘보유주식 수×선임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이사 5명을 뽑으면 1주를 가진 주주도 5표를 받으며, 이를 한 후보에게 모두 몰아줄 수 있다.
이 때문에 지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소수주주도 표를 한 후보에게 집중하면 이사회 진입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반면 최대주주는 여러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의결권을 나눠야 해 기존보다 영향력이 분산될 수 있다.
문제는 한 번에 선임하는 이사 수가 줄어들수록 집중투표제의 효과도 약해진다는 점이다.
법무부 연구자료에 따르면 이사 5명을 동시에 선임할 경우 후보 한 명을 확실하게 당선시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 지분은 약 16.7% 수준이다. 하지만 3명을 뽑으면 25%를 넘어야 하고, 2명을 선임할 경우에는 33.3%를 초과하는 지분이 필요하다. 이사 한 명만 뽑을 때는 사실상 일반적인 다수결 방식과 큰 차이가 없어진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이사회 전체 규모를 줄이거나 이사 임기를 분산해 한 번의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는 인원을 줄이는 방법을 검토해왔다.
실제로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50대 그룹 소속 상장사 가운데 비교가 가능한 269곳을 분석한 결과 전체 이사 수는 지난해 1780명에서 올해 1733명으로 47명 감소했다.
사내이사는 843명에서 807명으로 4.3% 줄었고, 사외이사도 937명에서 926명으로 감소했다. 그룹별로는 카카오가 14명으로 감소 폭이 가장 컸고 롯데 13명, 삼성 9명, LS 7명, 한화 6명 등이 뒤를 이었다.
정관을 고쳐 이사 수나 임기 구조를 변경한 기업도 29곳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14곳은 이사들의 임기 종료 시점을 서로 다르게 설계해 특정 주주총회에서 여러 이사가 동시에 교체되지 않도록 했다.
경영권 분쟁을 겪는 기업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나타난다.
한진칼은 이사회 최대 정원을 기존 11명에서 9명으로 줄였다. 회사 측은 이를 이사회 규모 정상화 차원의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측과 호반건설 측의 지분율 격차가 0.42%포인트까지 좁혀진 상황이라는 점에서 향후 이사회 진입 가능성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시장에서는 이런 변화가 개정 상법의 취지와 충돌할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법은 집중투표제를 통해 소수주주의 이사회 참여 가능성을 높였지만, 기업이 선임 이사 수를 줄이면 실질적인 당선 문턱은 오히려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사 수 축소만으로 집중투표제의 효력을 완전히 제한하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는 일정 비율 이상의 사외이사를 둬야 하고,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등 다른 지배구조 규제도 함께 시행되기 때문이다.
결국 향후 주주총회에서는 단순한 지분율 경쟁뿐 아니라 이사 정원과 임기 배분, 선임 시점 등 이사회 구조 자체가 새로운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집중투표제 도입 취지가 실제 소수주주 이사회 진입 확대라는 결과로 이어질지, 아니면 기업들의 지배구조 재설계가 이를 제한할지가 향후 주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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