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구리 시장의 공급 부족 우려가 커지고 있다. 광산에서 생산되는 구리 정광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제련소가 원료 확보를 위해 기존과 반대의 비용 구조를 감수하는 상황까지 나타나고 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전기차, 재생에너지 산업이 동시에 구리 사용량을 늘리는 가운데 공급 확대 속도는 제한적이어서 중장기적인 원료 경쟁이 심화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구리 제련수수료인 TC/RC는 광산업체가 구리 정광을 정련동으로 가공해주는 제련소에 지급하는 비용이다. 과거에는 톤당 70~90달러 수준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 정광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빠르게 떨어졌다.
올해 글로벌 구리 제련수수료 연간 기준가격은 사상 처음 톤당 0달러로 결정됐다. 2024년 톤당 80달러였던 수수료는 2025년 21.25달러까지 낮아졌고, 현물시장에서는 이미 마이너스 수준까지 내려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제련소가 원료를 확보하기 위해 사실상 광산업체에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다.
광산 공급 확대는 더디고 수요는 급증
구리 공급을 단기간에 크게 늘리기 어려운 점도 문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세계 구리 광산의 평균 품위는 1991년 이후 약 40% 낮아졌다. 같은 양의 구리를 생산하려면 과거보다 더 많은 광석을 채굴하고 처리해야 해 생산비와 에너지 사용량도 함께 증가한다.
신규 광산 발견도 감소하는 추세다. 지난 35년간 발견된 구리 광상 가운데 최근 10년 사이 발견된 물량은 약 5%에 불과하다.
새로운 광산을 발견하더라도 탐사와 환경평가, 인허가, 시설 건설을 거쳐 실제 생산에 들어가기까지 평균 17년가량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격이 오른다고 해서 공급이 즉시 늘어나는 구조가 아니라는 의미다.
반면 수요는 여러 산업에서 동시에 증가하고 있다.
각국의 노후 전력망 교체와 재생에너지 확대에는 대규모 송·배전 설비가 필요하고, 전기차 역시 내연기관차보다 더 많은 구리를 사용한다. AI 데이터센터도 서버뿐 아니라 변전설비와 냉각장치, 비상전원, 외부 전력망 연결 과정에서 상당량의 구리를 필요로 한다.
IEA는 현재 가동 중이거나 개발이 예정된 광산만으로는 2035년 글로벌 구리 수요의 약 30%를 충족하지 못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구리 부족, 전력 인프라 병목으로 이어질 수도
구리 부족이 장기화하면 문제는 원자재 가격 상승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전선과 변압기, 전동기 등 전력기기의 가격이 오르면 송전망과 배전망 구축 비용도 증가한다. 각국이 AI와 반도체, 전기차 산업 확대를 위해 전력 인프라 투자를 늘리는 상황에서 원재료 가격까지 상승하면 사업 일정 자체가 늦어질 수 있다.
전력망 구축이 지연되면 AI 데이터센터나 반도체 공장, 배터리 공장처럼 대규모 전력을 사용하는 시설의 가동 시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결국 구리가 AI와 전기차 시대의 또 다른 공급망 병목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별 확보 경쟁이 국가 간 원료 확보 경쟁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구리 가격이 형성되고 재고가 집중될 경우 다른 지역에서는 물량 부족이 심해질 수 있다. 실제로 국제 원자재 시장에서는 지역별 가격 차이에 따라 구리 재고가 이동하면서 공급 불균형이 커질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구리는 전력과 모빌리티, 디지털 산업을 모두 연결하는 핵심 원자재라는 점에서 공급 부족이 다른 원자재보다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AI 데이터센터, 전기차, 재생에너지, 전력망 투자가 동시에 확대되는 현재의 산업 구조에서는 특정 분야의 수요 감소만으로 전체 수급 문제가 해결되기도 어렵다.
결국 향후 구리 시장의 핵심 변수는 신규 광산 개발 속도와 재활용 확대, 지역별 재고 이동이 될 전망이다. 공급 증가가 수요 확대를 따라가지 못할 경우 구리는 단순한 원자재를 넘어 첨단산업의 투자 속도를 결정하는 전략 자원으로 중요성이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