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신약 개발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신약 후보물질 자체보다 치료 효과가 높을 환자를 찾아내는 ‘AI 바이오마커’ 시장이 먼저 사업화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신약 개발은 임상시험과 허가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반면, 바이오마커는 기존 의약품의 임상과 처방 과정에 바로 결합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빠른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바이오마커는 질병의 상태나 약물 반응을 판단하는 생물학적 지표를 뜻한다. 기존에는 유전자 검사나 단백질 발현 분석 등이 주로 활용됐지만, 최근에는 AI가 암 조직 이미지와 세포 구조, 면역세포 분포 등을 분석해 특정 유전자 변이나 약물 반응 가능성을 예측하는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AI가 신약 후보물질 발굴 속도를 크게 높여도 실제 환자에게 투여하는 임상시험은 생략할 수 없다. 효능과 안전성을 확인하려면 상당한 기간과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AI 신약 개발기업 인실리코메디슨의 폐섬유증 치료 후보물질 ‘렌토서팁’은 지난 7월 AI를 활용해 개발된 신약 후보 가운데 처음으로 임상 3상에 진입했다. 초기 후보물질 발굴 기간은 기존보다 크게 단축했지만 앞으로도 32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52주 동안 효능과 안전성을 검증해야 한다.
이처럼 AI가 신약개발의 앞단을 빠르게 만들 수는 있어도 임상시험과 허가라는 시간은 여전히 필요하다.
반면 AI 바이오마커는 바로 이 임상 과정에서 사업 기회를 만들고 있다.
약물이 잘 들을 가능성이 높은 환자를 미리 선별해 임상에 참여시키면 치료 효과를 보다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임상에 필요한 환자 수와 기간,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제약사 입장에서는 큰 장점이다.
루닛, 연구 분석으로 이미 매출 발생
국내에서는 의료 AI 기업 루닛이 관련 시장에 진입해 있다.
루닛의 AI 바이오마커 플랫폼 ‘루닛 스코프’는 암 조직 슬라이드를 분석해 종양 주변의 면역세포 분포와 유전자 변이 가능성, 항암제에 대한 반응 등을 예측한다.
현재는 글로벌 제약사 등이 보유한 병리·임상 데이터를 분석하고 수수료를 받는 연구용 사업이 중심이다. 상반기 관련 매출은 약 29억원 수준이지만, 신약 판매나 일반 의료진단이 아닌 바이오마커 분석 자체에서 매출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향후에는 AI 바이오마커가 특정 약물을 처방하기 전에 치료 효과 가능성을 확인하는 ‘동반진단’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동반진단이 실제 의료현장에서 표준 검사로 자리 잡고 보험수가까지 적용되면 신약 개발 단계의 일회성 연구비를 넘어 반복적인 검사 매출을 확보할 수 있다.
글로벌 제약사도 AI 바이오마커 확보 경쟁
글로벌 제약업계도 바이오마커 기술을 전략적인 자산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제약사 로슈는 지난 5월 미국 디지털 병리 AI 기업 패스AI를 선급금 7억5000만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 성과에 따른 추가 지급액까지 포함하면 거래 규모는 최대 10억5000만달러에 이를 수 있다.
대형 제약사가 AI 바이오마커 기업을 직접 확보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관련 기술의 가치가 크게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편으로는 독립적인 바이오마커 기업에 새로운 기회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패스AI가 로슈 계열에 편입되면 경쟁 제약사 입장에서는 자사의 민감한 후보물질이나 임상 데이터를 경쟁사 계열사에 제공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특정 제약사와 지분 관계가 없는 독립 플랫폼의 활용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시장에서는 아스트라제네카가 진행하고 있는 AI 바이오마커 기반 임상 결과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올해 하반기 전향적 임상 3상 결과가 공개될 예정으로, 실제 허가와 상업화로 이어질 경우 AI 바이오마커 산업의 성장 속도가 한층 빨라질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의료 AI 시장에서 먼저 돈을 벌기 시작한 분야는 신약 자체를 만드는 기술보다 ‘어떤 환자에게 약이 잘 들 것인가’를 찾아내는 기술이다.
AI 바이오마커가 임상시험을 넘어 실제 처방 전 검사와 동반진단 시장으로 확대될 경우 제약사의 신약 개발 효율을 높이는 동시에 의료 AI 기업에도 반복 매출을 제공하는 새로운 시장으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