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실험 조건을 설계하고 로봇이 직접 실험을 수행하는 ‘자율실험실(Self-Driving Laboratory·SDL)’이 차세대 연구개발(R&D)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소재·바이오·반도체·배터리처럼 반복적인 실험이 필요한 산업에서는 연구 기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핵심 기술로 떠오르는 모습이다.
한국미래기술교육연구원은 오는 9월 15일 서울 여의도 FKI 컨퍼런스센터에서 ‘AI·로봇 기반 R&D 자동화와 자율실험실 구축 전략’ 세미나를 온·오프라인으로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AI를 활용한 후보물질 탐색부터 로봇 기반 실험 자동화, 실험 결과 분석과 다음 조건 결정까지 연구 과정 전체를 연결하는 기술과 실제 산업 적용 사례를 다룬다.
AI→로봇→데이터→다시 AI…실험도 ‘폐루프’로
자율실험실의 핵심은 단순히 사람이 하던 실험을 로봇으로 대체하는 데 있지 않다.
AI가 기존 연구 데이터 등을 분석해 유망한 실험 조건을 찾아내면 자동화 장비와 로봇이 해당 실험을 수행한다. 여기서 나온 결과는 다시 AI로 전달된다. AI는 결과를 분석한 뒤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한 다음 실험 조건을 결정한다.
이처럼 ‘실험 설계→수행→분석→다음 실험 설계’ 과정이 반복되는 구조를 폐루프(Closed-loop) 방식이라고 한다.
기존 연구에서는 연구자가 직접 가설을 세우고 조건을 변경하면서 수많은 실험을 반복해야 했다. 자율실험실에서는 AI가 방대한 후보군 가운데 가능성이 높은 영역을 먼저 탐색하고 로봇이 반복 실험을 수행하면서 탐색 범위를 좁힐 수 있다.
특히 수많은 조성이나 공정조건을 비교해야 하는 신소재·화학 분야와 후보물질 탐색이 필요한 신약개발 분야에서 활용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와 배터리처럼 공정 변수와 소재 조합이 복잡한 산업에서도 연구 효율을 높일 수 있다.
관련 시장 역시 성장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들은 실험실 자동화 시장이 2030년까지 100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AI 기반 신약개발 시장 역시 같은 기간 연평균 25% 이상의 성장세를 나타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회사와 소재기업뿐 아니라 국가 연구기관들이 AI 기반 후보물질 탐색과 자동화 실험 플랫폼 구축에 뛰어드는 이유다.
신소재부터 바이오까지…산업별 구축 사례 공유
이번 세미나에서도 자율실험실을 실제 연구현장에 적용하는 방법이 집중적으로 논의된다.
먼저 AI를 이용해 수많은 후보물질과 후보소재 가운데 가능성이 높은 대상을 선별하는 스크리닝 기술과 폐루프 방식의 실험 최적화 전략을 다룬다. AI가 연구 과정에 직접 활용될 수 있도록 기존 연구장비를 자동화하고 데이터와 장비를 연결하는 인프라 구축 방안도 소개된다.
바이오 분야에서는 ADC(항체약물접합체) 제조 자율랩 구축과 바이오의약품 생산공정 최적화 사례를 살펴본다. AI와 의료장비를 연동하는 자동화 기술과 기존 연구실을 자동화 실험실로 전환하는 방법도 다룰 예정이다.
신소재 분야에서는 AI 자율실험실을 활용한 소재 개발 전략과 공정 시스템 구축, 운영체계와 AI 최적화 기술 등이 소개된다.
자율실험실이 확산되면 연구자의 역할도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반복적으로 실험하고 데이터를 정리하는 업무는 자동화하고, 연구자는 연구 방향을 설정하거나 결과를 해석하는 고부가가치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율실험실을 구현하려면 AI만으로는 부족하다. 실험장비와 로봇을 안정적으로 제어하는 기술부터 서로 다른 장비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표준화하고 AI가 분석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시스템까지 필요하다.
결국 경쟁력은 ‘좋은 AI 모델’을 만드는 것을 넘어 AI와 로봇, 연구장비, 데이터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얼마나 정교하게 연결하느냐에 달릴 것으로 보인다.
한국미래기술교육연구원 측은 자율실험실이 단순한 실험 자동화를 넘어 연구개발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플랫폼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후보물질 발굴부터 실험 설계와 데이터 분석, 공정 최적화까지 AI 활용 범위가 넓어지면서 기업의 R&D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AI가 연구자의 아이디어를 보조하는 단계를 넘어 스스로 다음 실험을 결정하는 시대가 가까워지고 있다. 자율실험실이 산업현장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다면 앞으로 기업의 기술 경쟁력은 연구인력의 규모뿐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실험하고 학습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이 인공지능(AI) 반도체와 파운드리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대규모 자금 조달에 나섰다. 당초 150억달러 규모로 계획한 유상증자에 예상보다 많은 투자 수요가 몰리면서 최대 200억달러 수준까지 조달 규모를 확대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인텔이 대규모 주식 공모에 나선 것은 1971년 상장 이후 처음이다. AI 반도체 시장이 급성장하는 상황에서 설비투자와 첨단공정 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해 반도체 시장에서 재도약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인텔은 10일(현지시간) 150억달러, 우리 돈 약 21조2000억원 규모의 보통주를 발행한다고 공시했다.
회사가 이번 증자를 결정한 배경에는 빠르게 증가하는 AI 인프라 투자가 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확대되면서 AI 가속기뿐 아니라 전용 반도체, 첨단 패키징, 웨이퍼 생산 등 반도체 공급망 전반에서 새로운 수요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텔은 특히 피지컬 AI와 전용 AI 칩, 첨단 패키징, 외부 웨이퍼 생산 분야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AI 투자 확대…연간 CapEx도 200억달러로
증자를 통해 확보한 자금은 AI 인프라를 비롯한 자본적지출(CapEx)과 운전자본 등에 활용할 예정이다.
인텔은 앞서 올해 2분기 실적 발표에서 연간 CapEx 전망치를 200억달러까지 높였다. 제품 경쟁력 강화와 파운드리 사업 확대를 위해 반도체 제조장비와 클린룸, 기판 등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반도체 산업은 대표적인 자본집약 산업이다. 미세공정이 발전할수록 생산라인 구축에 필요한 장비 가격이 상승하고 연구개발 비용도 증가한다. 특히 최첨단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하나의 생산라인을 구축하는 데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하다.
인텔은 최근 선단공정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자체 프로세서를 생산하는 종합반도체기업에서 벗어나 외부 고객의 반도체까지 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육성하고 있다.
AI 반도체 시장 확대는 이런 전략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AI 가속기와 주문형반도체(ASIC) 수요가 증가할수록 첨단공정과 패키징 생산능력을 보유한 파운드리 기업의 역할도 커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텔은 확보한 자금을 생산능력 확충과 공정 경쟁력 강화에 투입해 AI 반도체 생태계에서 영향력을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립부 탄 CEO 체제, 재무구조 개선도 병행
이번 증자는 립부 탄 CEO 취임 이후 추진하고 있는 재무구조 개선 작업과도 연결돼 있다.
인텔은 대규모 설비투자를 지속하면서도 재무건전성을 유지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자체 현금만으로 모든 투자를 감당하기보다는 증자를 통해 자본을 확충하면 부채 부담을 억제하면서 필요한 투자를 이어갈 수 있다.
투자적격 신용등급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다. 신용등급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 향후 회사채를 발행하거나 추가 자금을 조달할 때 상대적으로 유리한 금리를 적용받을 수 있다.
결국 이번 증자는 단순한 자금 확보를 넘어 재무구조를 안정시키면서 AI와 파운드리에 필요한 대규모 투자를 지속하기 위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시장 반응도 예상보다 뜨거운 것으로 전해졌다.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인텔의 주식 발행에는 1000억달러가 넘는 투자 수요가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계획했던 150억달러의 6배를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
이에 따라 인텔은 실제 증자 규모를 약 200억달러까지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초과배정옵션까지 행사할 경우 최종 조달액이 200억달러를 상당폭 넘어설 가능성도 있다.
공모가격은 주당 95달러 안팎이 거론되고 있지만 최종 가격과 발행 규모는 확정되지 않았다. 이번 공모에는 JP모건체이스와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씨티그룹 등이 주관사로 참여한다.
투자자는 ‘희석 우려’…주가 4.1% 하락
다만 대규모 증자가 기존 주주에게 무조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새로운 주식을 대량으로 발행하면 전체 발행주식 수가 증가하기 때문에 기존 주주가 보유한 지분의 상대적 가치가 낮아지는 희석 효과가 발생한다. 증자로 확보한 자금이 향후 충분한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주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증자 소식이 전해진 이후 인텔 주가는 10일 뉴욕증시에서 4.1% 하락한 97.52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하지만 올해 전체 흐름을 보면 상황은 다르다. 인텔 주가는 AI 반도체 시장 성장 기대와 재무구조 개선 전망 등에 힘입어 연초 이후 약 164% 상승했다. 투자자들이 단기적인 지분 희석 부담과 중장기 성장 가능성을 동시에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향후 관건은 조달한 자금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다.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더라도 선단공정의 수율과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거나 외부 파운드리 고객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투자 부담이 다시 재무적 압박으로 돌아올 수 있다.
반대로 AI 반도체 수요 증가를 실제 파운드리 수주와 제품 매출로 연결한다면 이번 증자는 인텔이 경쟁력을 회복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결국 21조원이 넘는 대규모 자금 조달은 인텔이 AI 시대의 반도체 경쟁에서 다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던진 승부수다. 이제 시장의 관심은 증자 규모 자체보다 인텔이 확보한 자금을 첨단공정과 AI 사업의 실질적인 성과로 얼마나 빠르게 전환할 수 있을지에 모일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초미세공정 경쟁에서 무조건적인 속도전보다 기술 완성도와 양산 안정성을 우선하는 전략을 택했다. 1.4나노 공정 양산 시점을 2029년으로 조정하고 차세대 노광 기술인 하이NA(High-NA) EUV도 1나노 공정부터 본격적으로 적용할 계획이다.
TSMC와 인텔이 각각 1.4나노급 공정 양산을 2028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삼성전자의 일정은 약 1년 늦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당장 1.4나노 경쟁에 뛰어들기보다 현재 주력인 2나노 공정의 수율과 생산성을 안정시키는 데 역량을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는 당초 2027년으로 제시했던 1.4나노 공정 양산 목표를 2029년으로 늦췄다. 동시에 하이NA EUV를 1.4나노에 적용하는 대신 1나노 공정부터 양산에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이NA EUV는 기존 EUV 장비의 수치개구수(NA)를 0.33에서 0.55로 높인 차세대 노광 기술이다. 반도체 회로가 미세해질수록 더욱 정교한 패턴을 웨이퍼에 구현해야 하는데, 높은 NA를 활용하면 기존 장비보다 미세한 회로를 형성하는 데 유리하다.
하지만 새로운 장비를 먼저 사용하는 것이 반드시 양산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장비 가격과 공정 비용뿐 아니라 수율, 생산성, 장비 안정성 등을 모두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창민 삼성전자 마스터는 최근 ‘2026 차세대 리소그래피+패터닝 학술대회’에서 2나노와 1.4나노에 하이NA EUV를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아직 기술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1.4나노까지 기존 0.33NA EUV를 이용한 멀티패터닝 기술을 중심으로 양산하고 하이NA EUV는 2030년께 1나노 공정부터 활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 당장의 승부처는 ‘2나노’
1.4나노 일정이 뒤로 밀리면서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의 단기 경쟁력을 결정할 핵심은 2나노가 됐다.
파운드리에서는 공정의 숫자를 얼마나 빨리 낮추느냐만큼 실제 양산에서 얼마나 높은 수율을 확보하느냐가 중요하다. 수율이 충분하지 않으면 생산량을 늘려도 정상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칩의 비율이 떨어져 제조원가가 상승하고 고객사의 신뢰를 확보하기 어렵다.
삼성전자는 현재 2나노 공정의 수율과 생산성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특히 2나노 수율을 개선하면서 테슬라의 차세대 AI 칩 생산 물량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공장을 비롯한 생산거점 확대도 추진하고 있다.
삼성전자로서는 2나노에서 대형 고객사를 확보하고 안정적인 양산 실적을 만드는 것이 이후 1.4나노와 1나노 경쟁에서도 중요하다. 최첨단 공정의 기술력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결국 고객사의 제품을 안정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사 TSMC는 삼성전자보다 1.4나노 양산에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
TSMC는 대만 타이중 과학단지에 1.4나노 생산시설을 구축하고 있으며 2027년 시험 생산을 거쳐 이르면 2028년 대량 양산에 들어갈 가능성이 거론된다. 삼성전자가 목표로 하는 2029년보다 약 1년 빠르다.
흥미로운 점은 TSMC 역시 1.4나노 공정에서 하이NA EUV를 사용하지 않을 계획이라는 것이다.
TSMC는 기존 EUV, 인텔은 하이NA 승부수
TSMC는 1.4나노급 A14 공정에 검증된 0.33NA EUV 멀티패터닝 기술을 적용할 예정이다. 새로운 노광장비를 빠르게 도입하기보다는 기존 장비와 공정기술을 활용해 수율과 생산성을 확보하는 전략이다.
삼성전자와 TSMC 모두 하이NA EUV를 서둘러 적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1.4나노 양산 시점에서는 차이가 나타나는 셈이다.
반면 인텔은 다른 전략을 선택했다.
인텔은 1.4나노급으로 평가되는 ‘인텔 14A’에 하이NA EUV를 적극적으로 적용할 계획이다. 차세대 노광장비를 경쟁사보다 먼저 양산공정에 투입해 선단공정의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14A에는 하이NA EUV뿐만 아니라 2세대 리본펫(RibbonFET) 트랜지스터와 후면 전력공급 기술인 ‘파워다이렉트’도 적용할 예정이다. 2027년 리스크 생산을 시작하고 2028년부터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다만 새로운 기술을 먼저 도입한다고 해서 파운드리 시장에서 바로 우위를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최첨단 공정은 개발비와 설비투자 비용이 막대한 만큼 충분한 고객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투자 부담이 급격히 커질 수 있다. 인텔 역시 14A에서 대형 외부 고객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선단공정 개발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결국 삼성전자와 TSMC, 인텔의 전략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TSMC는 기존 EUV 기술을 활용하면서 1.4나노 양산 시기를 앞당기고, 인텔은 하이NA EUV를 먼저 투입해 기술 선점에 나선다. 삼성전자는 1.4나노와 하이NA EUV 적용 시점을 늦추는 대신 현재 2나노 공정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1.4나노 양산이 경쟁사보다 1년 늦다는 사실보다 그 기간 동안 2나노에서 얼마나 높은 수율을 확보하고 대형 고객사를 추가로 끌어들이느냐가 더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초미세공정 경쟁이 단순한 ‘나노 숫자 경쟁’을 넘어 실제 생산성과 고객 확보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2나노에서 양산 경쟁력을 입증하고 이를 1.4나노와 1나노로 이어갈 수 있을지가 향후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의 점유율을 좌우할 핵심 관전 포인트다.
산업 현장의 자동화 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가운데 로봇 플랫폼 기업 브릴스가 코스닥 상장에 나선다. 단순히 로봇을 제조·판매하는 기업에서 벗어나 다양한 로봇과 공정기술을 결합하는 ‘모듈형 자동화 플랫폼’을 앞세워 국내외 산업 현장을 공략한다는 전략이다.
브릴스는 서울 여의도에서 기업공개(IPO) 기자간담회를 열고 향후 사업 전략과 성장 계획을 공개했다. 회사가 강조한 핵심은 산업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로봇 자체가 아니라 로봇을 이용해 생산성과 품질을 높일 수 있는 ‘완성된 자동화 솔루션’이라는 점이다.
전진 브릴스 대표는 로봇을 자동차의 엔진에 비유했다. 엔진이 자동차의 핵심 부품이지만 소비자가 엔진만 구입하지 않는 것처럼 제조기업 역시 로봇 한 대를 구매하는 것보다 실제 생산공정에 적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는 설명이다.
브릴스는 협동로봇과 산업용 로봇, 물류로봇 등 자체 하드웨어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특정 제조사의 로봇만 사용하는 방식은 지양한다. 고객이 원하는 공정에 따라 자사 제품뿐 아니라 다른 제조사의 로봇도 활용할 수 있도록 플랫폼을 구축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를 통해 특정 하드웨어의 성능이나 시장 규모에 사업이 종속되는 것을 피하고 제조, 물류, 식품, 조선, 방산, 의료 등 다양한 산업으로 자동화 사업을 확장한다는 구상이다.
일회성 SI 넘어 ‘기술 자산’ 쌓는다
브릴스가 기존 로봇 시스템통합(SI) 기업과 가장 큰 차별점으로 내세우는 것은 ‘모듈화’다.
산업용 로봇을 실제 생산라인에 적용하려면 로봇 제어뿐만 아니라 비전 검사와 안전 시스템, 엔드이펙터, 공정기술 등 여러 요소가 필요하다. 브릴스는 이 기술들을 각각 모듈화한 뒤 고객의 생산환경에 맞춰 조합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전통적인 SI 사업은 고객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는 경우가 많다. 고객별 요구사항에 맞춰 커스터마이징해야 하기 때문에 수주가 증가하면 엔지니어와 개발비 부담 역시 함께 커지는 구조다.
브릴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개발한 기술을 일회성으로 소비하지 않고 요소기술 단위로 분해해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축적한다. 비슷한 자동화 요구가 발생하면 기존에 확보한 모듈을 활용할 수 있어 프로젝트가 늘어날수록 개발 부담과 원가를 낮출 수 있다는 설명이다.
프로젝트 규모도 커지고 있다. 브릴스에 따르면 과거 평균 4000만원 수준이었던 프로젝트 단가는 2023년 약 7000만원으로 상승했고 최근에는 1억6000만원 수준까지 확대됐다. 회사는 향후 프로젝트당 평균 금액이 2억원 이상으로 커질 가능성도 기대하고 있다.
외형 성장도 이어지고 있다. 브릴스의 매출은 2020년 약 40억원에서 지난해 238억원까지 증가했다. 올해 6월 말 기준으로는 연간 목표 수주잔고의 90% 이상을 이미 확보했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해외 매출 확대…북미 자동화 시장 겨냥
해외 시장도 브릴스가 IPO 이후 집중적으로 공략할 분야다.
브릴스는 현재까지 17개국에 제품과 솔루션을 수출한 경험을 확보했다. 특히 북미 시장의 누적 매출이 210억원을 넘어섰으며 올해 상반기 전체 매출 가운데 해외 수출 비중도 50% 이상을 차지했다.
미국 시장에서는 인건비 부담과 작업장 안전 기준 등이 자동화 수요를 자극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브릴스는 내년 미국에 공급할 예정인 장비 규모만 200억원 이상이라고 밝혔다.
국내 주요 기업과의 협력도 사업 확장의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다.
포스코는 브릴스에 70억원을 전략적으로 투자했고 양사는 산업현장에 로봇 자동화 솔루션을 적용하는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현대중공업과는 LNG 선박 관련 기술을 공동 개발했으며 LG CNS와는 LG에너지솔루션에 공급하는 자율이동로봇(AMR)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두산로보틱스와의 협력에서는 브릴스가 팔레타이징 솔루션을 개발하고 두산로보틱스가 이를 판매하는 형태의 사업모델도 구축했다.
로봇도 ‘구독’…RaaS 사업 확대
브릴스는 장기적으로 프로젝트 중심의 매출 구조를 보완하기 위해 로봇서비스(RaaS·Robot as a Service) 사업도 확대할 계획이다.
로봇 자동화를 도입하려는 중소·중견기업에는 초기 장비 구매비용이 상당한 부담이다. 도입 이후 유지보수와 시스템 관리에 필요한 전문인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도 로봇 도입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브릴스는 이런 기업들을 대상으로 로봇과 자동화 시스템을 직접 판매하는 대신 검증과 금융, 운영관리, 유지보수, 업그레이드 등을 묶어 제공하는 구독형 모델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RaaS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면 프로젝트를 수주할 때마다 매출이 발생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장기간 반복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넘어야 할 과제도 있다. 산업 자동화 사업은 프로젝트 수주와 납품 시기에 따라 매출 인식 시점이 달라질 수 있어 분기별 실적 변동성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RaaS 역시 서비스 제공자가 초기 장비와 운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반복 매출 구조가 형성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브릴스의 IPO 이후 기업가치를 좌우할 핵심은 기존 SI 사업과 얼마나 다른 수익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있다. 프로젝트 과정에서 확보한 공정기술과 현장 데이터를 실제 재사용 가능한 자산으로 전환하고, 이를 여러 산업과 해외 고객에게 반복 공급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브릴스는 이번 코스닥 상장에서 총 120만주를 모두 신주로 공모한다. 희망 공모가격은 주당 1만6500~1만9500원으로 공모 예정 금액은 198억~234억원이다.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수요예측은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진행하며 이를 통해 최종 공모가를 결정한다. 일반투자자 청약은 9월 8~9일로 예정돼 있다.
로봇 제조업체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하드웨어 자체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브릴스는 ‘어떤 로봇을 만드느냐’보다 ‘로봇을 산업현장에 어떻게 적용하느냐’를 성장 전략으로 내세웠다. 이번 IPO를 통해 확보한 자금을 바탕으로 모듈형 자동화 플랫폼이 실제 규모의 경제와 반복 매출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향후 성장성을 가를 것으로 보인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의 수혜가 반도체를 넘어 핵심 전자부품으로 확산하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국내 기술주 가운데 삼성전기를 최선호주로 제시하며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와 반도체 패키지 기판 사업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했다.
업계에 따르면 모건스탠리는 삼성전기에 대한 투자 의견을 ‘비중 확대’로 유지하면서 목표주가를 기존 256만원에서 262만원으로 높였다. 시장 상황이 긍정적으로 전개되는 강세 시나리오에서는 300만원까지 상승할 가능성도 제시했다. 기존 국내 기술주 최선호주였던 삼성전자 대신 삼성전기를 선택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모건스탠리가 삼성전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핵심 배경에는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있다. 생성형 AI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구축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고성능 전자부품 수요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제품이 MLCC다. MLCC는 전자제품 내부에서 전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불필요한 노이즈를 제거하는 핵심 부품이다. 스마트폰과 자동차는 물론 서버와 네트워크 장비에도 대량으로 사용된다.
특히 AI 서버는 기존 범용 서버보다 높은 연산 성능을 요구하고 전력 소비량도 크다. 안정적인 전원 공급이 중요해지면서 고성능 MLCC의 탑재량과 요구 사양이 함께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모건스탠리는 최근 AI 관련 고객사들을 중심으로 MLCC 물량을 사전에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데이터센터 투자 계획이 장기화하면서 필요한 부품을 미리 주문하는 고객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선주문이 확산하면 공급업체 입장에서는 향후 수요를 미리 확보할 수 있다. 동시에 시장에서 공급 부족 현상이 나타날 경우 제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삼성전기에는 물량 증가와 가격 상승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가격과 수익성이 높은 고부가가치 MLCC 판매 비중까지 높아지면 매출 증가 이상의 수익성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모건스탠리는 이런 흐름을 근거로 삼성전기의 마진과 주당순이익(EPS)이 시장의 기존 예상치를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AI 매출 비중 20%에서 31%로 확대 전망
삼성전기의 사업 구조가 AI 중심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인 요소로 꼽혔다.
모건스탠리는 삼성전기 전체 매출에서 AI 관련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올해 약 20%에서 내년에는 31% 수준까지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불과 1년 사이 전체 매출의 약 3분의 1이 AI와 관련된 사업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삼성전기가 그동안 스마트폰과 PC 등 전통적인 IT 제품의 업황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면 앞으로는 AI 서버와 데이터센터라는 새로운 수요처가 실적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MLCC와 함께 반도체 패키지용 ABF 기판도 주요 성장 동력으로 평가됐다.
AI용 주문형반도체(ASIC)를 비롯한 고성능 칩이 발전할수록 반도체 패키지 역시 대형화·고사양화한다. 하나의 칩에서 처리하는 데이터가 증가하고 필요한 전력량도 커지면서 칩과 메인보드를 연결하는 패키지 기판의 성능 역시 중요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다층·대형 ABF 기판에 대한 수요가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모건스탠리는 삼성전기의 ABF 사업이 장기간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와 비교해 2030년 ABF 매출이 4~5배까지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전기가 AI 반도체용 기판 수주를 확대하는 동시에 베트남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있다는 점도 성장 전망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평가했다.
MLCC·ABF 동시 성장…차세대 기판까지 준비
삼성전기가 MLCC와 ABF 기판을 동시에 공급할 수 있다는 점도 경쟁력이다.
AI 데이터센터 시장이 성장하면 단순히 서버 숫자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서버 한 대에 들어가는 부품의 성능도 함께 높아진다. 삼성전기는 전력 안정성에 필요한 MLCC와 고성능 반도체에 필요한 패키지 기판을 모두 사업 포트폴리오에 갖추고 있어 AI 인프라 투자 확대의 효과를 복수 사업에서 흡수할 수 있다.
여기에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시장을 겨냥한 유리기판과 실리콘 커패시터 등 신규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MLCC와 ABF가 현재의 실적 성장을 담당한다면 차세대 제품은 중장기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는 평가다.
증시도 이 같은 기대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3일 오후 2시 50분 기준 삼성전기 주가는 전 거래일보다 약 13.6% 오른 151만8000원 수준에서 거래됐다. 장중에는 154만8000원까지 상승했다. 거래량은 약 91만주, 거래대금은 1조3700억원을 넘어섰다.
모건스탠리의 목표주가 상향과 최선호주 선정이 투자심리를 자극한 가운데 미국 반도체주 강세도 국내 AI·반도체 관련 종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AI 투자 경쟁의 수혜 범위가 GPU와 메모리 반도체에서 서버 내부의 핵심 부품으로 넓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삼성전기의 향후 실적도 주목받을 전망이다. 특히 MLCC 선주문이 실제 가격 상승으로 연결되는지, AI용 ABF 기판 매출이 예상대로 확대되는지가 중장기 성장세를 결정할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 전반에 인공지능(AI)을 적용하기 위한 전문 인력 확보에 나섰다. AI 모델 개발과 데이터 인프라 구축 분야의 전문가를 동시에 영입해 반도체 설계부터 공정, 제조까지 이어지는 업무 효율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딥러닝과 비전 AI 분야 전문가인 한보형 펠로우와 데이터 엔지니어링 전문가인 한태린 상무를 영입했다. 두 사람은 각각 반도체 연구개발(R&D)에 활용할 AI 모델과 AI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 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번 인사의 핵심은 반도체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에 AI와 데이터 활용 능력이 빠르게 추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세공정이 고도화하고 반도체 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설계와 제조 과정에서 처리해야 하는 데이터 역시 크게 늘어난다. 사람이 일일이 데이터를 분석하고 문제를 찾아내는 기존 방식만으로는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삼성전자가 AI 전문인력을 적극적으로 확보하는 것도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한보형 펠로우는 반도체 R&D 업무에 특화된 AI 모델 개발을 주도한다. 서울대학교에서 컴퓨터공학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미국 메릴랜드대학교에서 컴퓨터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포항공대 컴퓨터공학과 조교수를 거쳐 2018년부터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특히 한 펠로우는 이미지와 영상에서 사물이나 특정 패턴을 찾아내고 분석하는 ‘비전 AI’ 분야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비전 AI 기술을 반도체 개발과 제조 과정에 적용하면 방대한 이미지 데이터를 빠르게 분석하고 사람이 놓치기 쉬운 패턴이나 이상 징후를 찾아내는 데 활용할 수 있다.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는 웨이퍼와 회로 등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결함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느냐가 생산성과 직결된다. AI를 활용한 분석 기술이 고도화할수록 공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조기에 발견하고 대응할 가능성도 커지는 셈이다.
한태린 상무는 이 같은 AI 기술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데이터 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맡는다.
한 상무는 서울대 기계항공우주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에서 기계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 메타에서 시니어 엔지니어링 매니저로 근무했고, 2025년에는 페르소나에서 시니어 개발자로 활동했다.
삼성전자가 한 상무에게 맡긴 핵심 업무는 ‘AI Ready Data’ 구축이다. 기업이 보유한 데이터를 단순히 저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AI가 학습과 분석에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정제하고 표준화하는 작업이다.
AI 모델의 성능은 알고리즘뿐만 아니라 어떤 데이터를 학습하느냐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진다. 반도체 설계와 제조 현장에서 축적되는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관리한다면 AI가 공정 이상을 분석하거나 개발 과정에서 필요한 판단을 지원하는 범위도 넓어질 수 있다.
삼성전자는 두 전문가의 역량을 결합해 반도체 사업의 AI 전환을 가속할 계획이다. 한쪽에서는 반도체 업무에 최적화한 AI 모델을 개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당 모델이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적용 범위도 연구개발에만 머물지 않는다. 설계 단계에서는 AI를 활용해 개발 효율성을 높이고, 공정과 제조에서는 축적된 데이터를 분석해 생산 과정을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활용 범위를 확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삼성전자가 추진하는 전략은 AI를 개별 업무를 보조하는 도구가 아니라 반도체 개발과 생산 과정 전반의 경쟁력을 높이는 핵심 기술로 활용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반도체 산업에서 미세공정과 생산능력뿐만 아니라 AI를 활용한 개발 속도와 제조 효율성까지 중요한 경쟁 요소로 떠오르는 가운데, 삼성전자는 앞으로도 AI와 데이터 분야 전문 인력을 확보하고 관련 역량을 조직 전반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