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전기차 보급 확대가 자동차 산업을 넘어 아시아 정유시장까지 흔들고 있다. 중국 내 휘발유와 경유 소비가 줄면서 정유사들이 남는 물량을 해외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산 석유제품 수출이 늘어나면 아시아 시장에서 한국 정유사들과의 가격 경쟁도 한층 치열해질 가능성이 크다.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중국의 전체 석유 소비량은 전년 동기보다 9% 감소했다. 자동차와 화물차 등에 사용되는 운송용 석유 소비는 같은 기간 16% 줄었다.
중국 경기 둔화와 국제유가 상승도 영향을 미쳤지만, 가장 구조적인 요인으로는 전기차와 전기트럭의 빠른 보급이 꼽힌다. 올해 상반기 중국에서 전기차가 대체한 석유 소비량은 약 3600만t으로 추산된다. 전기트럭이 대체한 석유 소비량 역시 지난해보다 약 90%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전기차 비중이 높아질수록 내연기관 차량에 필요한 휘발유와 경유 수요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유시설의 생산능력을 단기간에 줄이기 어렵다는 점이다.
중국 정유사 입장에서는 내수 판매가 감소하더라도 정제설비의 가동률을 유지해야 한다. 결국 생산된 석유제품을 항공유나 석유화학 원료로 전환하거나 해외시장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커진다.
중국 석유제품 수출 다시 증가
중국 정부는 올해 3월부터 자국 내 공급 안정을 이유로 휘발유와 경유, 항공유 수출을 제한했다. 하지만 7월부터 관련 통제를 점진적으로 완화하면서 수출 물량이 다시 증가하고 있다.
홍콩과 마카오 공급분, 중국 공항에서 국제선 항공기에 공급하는 물량 등을 포함하면 지난 8월 중국의 석유제품 수출 계획은 360만~370만t 수준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월평균 휘발유·경유·항공유 수출량보다 최대 22% 많은 규모다.
9월에는 수출량이 400만t을 넘어설 가능성도 거론된다. 업계에서는 항공유가 최대 240만t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경유가 100만t 이상, 휘발유가 최대 60만t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이 내수 감소분을 해외로 돌리기 시작하면 아시아 석유제품 시장의 공급량이 늘어난다. 공급이 수요보다 빠르게 증가할 경우 제품 가격과 정제마진에도 하방 압력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내 정유업계에 직접적인 부담이 될 수 있다.
SK에너지와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주요 정유사들은 대규모 정제시설에서 생산한 휘발유와 경유, 항공유 상당량을 해외에 판매하고 있다.
국내 정유 4사의 지난해 석유제품 수출량은 약 4억8500만배럴로 집계됐다. 중국 역시 연간 약 4억2000만~4억6000만배럴의 정유제품을 해외에 판매하는 것으로 추산돼 수출 규모 면에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필리핀·베트남·호주서 경쟁 심화 가능성
더 큰 문제는 양국의 주요 수출시장이 상당 부분 겹친다는 점이다.
중국은 경유와 항공유를 호주와 필리핀, 베트남, 방글라데시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공급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한국 정유사들도 대규모 물량을 판매하는 핵심 시장이다.
한국은 2024년 필리핀에 500만t 이상, 베트남에는 370만t 이상의 석유제품을 수출했다. 중국산 제품 공급이 확대되면 현지 시장에서 한국 정유사들이 가격 경쟁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호주 시장도 비슷하다. 한국은 호주가 수입하는 경유의 최대 공급국이며 항공유에서도 주요 공급국 가운데 하나다. 중국 역시 호주 항공유 시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중국의 전기차 보급 속도가 정유시장 판도를 바꾸는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중국자동차공업협회에 따르면 올해 중국 내 전기차 등 신에너지차의 누적 판매 비중은 51% 수준까지 올라왔다. 신에너지차 비중이 계속 확대되면 중국의 휘발유와 경유 소비 감소세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중국 정유사들은 내수 감소를 수출 확대와 석유화학 사업 강화로 상쇄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국내 정유업계로서는 중국의 전기차 확대가 단순한 자동차 시장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 셈이다. 중국에서 줄어든 석유 소비가 오히려 아시아 수출시장으로 흘러나오면서 경쟁국의 공급 증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향후 한국 정유사들의 실적은 국제유가뿐 아니라 중국의 석유제품 수출 규모와 아시아 지역의 정제마진 변화에도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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